사람들이 당신에게 원하는 것...

안철수 국민의 당 대표님께

몇 년전이었지요, 무릎팍 도사 라는 티비 프로그램에 당신이 나오셨던 게.
당신은 시종일관 수줍은 듯 조용한 목소리로 진행자의 터프한 질문 공세에도 밀리지 않는 내공을 보이며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나갔습니다.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 때 당신의 모습과 당신이 풀어 놓는 당신에 관한 이야기에 적잖이 호감을 느꼈던 걸로 기억합니다.

사람의 병을 고치는 의사에서 바이러스에 감염된 컴퓨터를 고치는 공학자로 그리고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로 일하는 당신을 보면서 사람들은 당신이 가늘고 조용한 목소리를 가졌지만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머뭇거리지 않고 밀고 나가는 단단한 사람이란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던 지난 봄이었지요. 급박하게 치르게 된 2017년 대선에 나온 당신의 모습은 뜻밖이었습니다. 이전의 가늘고 부드럽던 목소리가 아닌 굵은 중저음의 목소리로 연설을 하시더군요.
혹자는 당신의 목소리가 인위적이라며 거북스러워 했지만, "...다아아아"하고 우렁찬 목소리로 문장의 끝을 마무리 하는 당신을 보면서 초등학교 시절 추억의 웅변대회가 떠올랐고, 일상에 지친 우리들에게 그렇게 추억을 선물하는 당신이 고맙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추억의 웅변대회 말고도, 뜬금 없지만, 제겐 영국 왕 조지 6세도 떠올랐습니다.
말 더듬는 장애가 있었던 그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고 사람들 앞에서 연설하는 이야기는 이미 영화로도 만들어져 많이 알려져 있지요.아마 당신도 잘 아실 겁니다.
영화는 그가 자신의 장애를 극복하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만, 저는 영화에서 미처 다 다루지 못한 그의 이야기에 더 끌립니다.
왕위에 오르기 전 부터 그는 서민들의 삶에 관심이 많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히틀러와의 전쟁을 선포한 이 후 계속되는 독일군의 공습에도 불구하고 버킹검 궁을 떠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그는 자기 국민들 옆에 머무르지요.
그가 전쟁을 선포하면서 국민들에게 했던 실제 연설을 들어 보면 그의 목소리는 그의 마른 체구만큼이나 가늘고 말의 속도도 빠르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그가 한 이야기는 너무 스탠다드해서 딱히 특별하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 연설은 전쟁을 앞두고 불안에 떨던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사람들의 뜻을 하나로 모이게 하는데 큰 역활을 합니다.
누군가의 이야기가 평소의 그의 모습과 같은 방향을 향해 놓여 있을때 사람들은 그의 이야기를 가슴으로 받아 들입니다. 백여년 전 영국인들은 그의 연설을 그렇게 받아 들인 듯 합니다.
폭격에도 자기 국민들 곁을 떠나지 않았던 조지 6세의 이야기를 보면서 저는 당신이 얼마 전 당 대표 수락 연설에서 했던 말들을 떠올렸습니다.
"적진에 제일 먼저 달려 갈 것이고, 적진에서 제일 나중에 나올 것이고, 단 한 명의 동지도 고난 속에 남겨 두지 않을 것입니다"
이 멋진 문장이 멜 깁슨의 영화 속 대사와 비슷하다는 이야기는 굳이 하지 않겠습니다. 이것 말고도 당신은 연이어 멋진 말들로 연설을 이어 나갑니다.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인정 받고, 선한 사람들이 상처 받지 않기를 바라는 보통 국민들과 같은 편에 서는 것이 중도입니다....안타까운 일에는 국민들 보다 먼저 아파하고, 국민이 대부분 환호할 때야 기쁨을 공유하는 ...국민이 바라보는 곳을 같이 바라 보는 정당이 될 것입니다."
어렵지 않은 말로 정치인이 해야 할 일들을 당신은 멋지게 표현해 냈습니다. 그런데,이런 멋진 말들을 들으면서 저는 이상하게도 뭔가 조금 불편했습니다. 입 안에서 자꾸만 모래가 서걱거리는 것 같았습니다. 제가 좀 전에 말씀 드렸듯,누군가의 말이 진정한 힘을 가지기 위해선 그의 말이 그가 평소 하는 행동과 같은 방향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당신이 늘 이야기 하는 중도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당신이 제천국제음악영화제 인증샷을 날릴때 세월호 사건으로 자식을 잃은 부모들은 자식들이 억울하게 죽은 이유를 밝히기 위해 단식중이었다는 것 기억하시는 지요?
매 순간, 안타까운 일을 겪는 국민들 앞에서, 상처 받고 우는 사람들 앞에서 당신은 늘 말을 아꼈습니다. 당 대표로서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경청해서 신중하게 결정하기 위함이라는 당신의 입장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적진에 먼저 달려 가고 제일 나중에 나오기 위해선 최소한 언제가 "먼저"인지,언제가 "제일 나중"인 지 알아야 합니다 .그 "먼저"와 "나중"을 제대로 가늠하지 못할때 당신이 같은 편에 서겠다고 말한 그 국민들은 기다림에 지쳐 쓰러질 지도 모릅니다.
"국민이 죽어가는 절박한 시기에 국민을 대표해야 할 야당 대표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 우린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 는 세월호 유가족의 이야기는 "약자의 고통 앞에 정치적 중립은 없다" 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과 겹쳐져 들려 옵니다. 

9월 11일, 그러니까 어제 김이수 헌법 재판소장 후보자 인준안이 국회에서 부결된 데 대해 당신은 당신의 블로그에 국민의 당이 20대 국회의 결정권을 가졌다는 자평을 남겼습니다.
소수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헌법 재판관이 소장으로 임명되는 멋진 일이 생기길 기대하던 많은 사람들의 바램이 당신과 당신 동료들로 인해 한순간에 날아가 버린 날이었습니다. 보통의 많은 사람들이 환호하고 기뻐하고 싶었던 순간을 통째로 날려 버리는 일을 한 당신이 20대 국회 결정권 운운한 일은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서늘하게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당신에게서 멋진 머리칼을 원하는 게 아니야"
6년 전 독일의 한 젊은 장관이 사퇴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촉망 받던 보수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고 승승장구 하던 젊고 잘 생긴, 그야 말로 윤기가 흐르는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졌던 그의 발목을 잡은 건 박사 학위 논문 표절이었습니다. 그의 사퇴를 외치며 거리로 나온 사람들이 들고 있던 피켓에 저 문장이 쓰여져 있었습니다.
독학으로 중저음의 톤을 터득한 당신의 노력도 참 멋진 일이긴 합니다만, 사람들이 당신에게 원하는 게 뭔지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건 멋진 목소리가 아니라는 걸 당신이 아셨으면 합니다.
당신이 하는 이야기와 당신이 하는 행동이 보통 사람들이 바라보는 곳과 같은 곳을 향할 때, 그렇게 당신이 안타까운 일을 겪는 사람들을 위해, 상처 받고 힘들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거침 없이 행동해 나갈때 당신이 멋진 중저음의 톤으로 우리에게 건네는 말들이 더 이상 서걱거리지 않고 우리 가슴 속에 들어올 것 입니다. 

아,그리고.
다른 정치인들에게 자꾸 "내가 MB 아바타냐...내가 갑철수냐" 묻고 다니지 않으셨음 합니다.
정치인들의 이름 앞에 수식어를 붙이는 일은 정치인의 몫이 아니라 보통 사람들의 몫입니다.
당신들에 대한 평가를 할 수 있는 공식적인 기회가 고작 몇 년에 한 번 있는 선거 뿐인 우리들로서는 평소 당신들의 말과 직무수행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거니까요.
많은 사람들이 MB가 무슨 일을 했는지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신이 하는 말들과 행동을 보고 당신에게 그 닉네임을 선사할 지, 말 지 사람들이 결정할 겁니다.
다른 건 몰라도 최소한 어제의 일로 당신이 별로 마뜩잖게 느끼는 저 닉네임으로 당신 스스로 한 발 성큼 다가가셨다는 것 정도는 말씀 드릴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만 총총

페북 따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