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으로서의 염치

전두환씨,

안 그래도 당신에게 한 번은 편지를 써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참에 얼마 전 당신의 회고록 출간 소식을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으로,만약 당신이 책을 낸다면 아마도 실용서가 될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전 재산 29만원으로 골프를 치며 노후를 즐기는 법' 같은 재테크 관련 서적 말입니다.

한 달 버는 돈이 당신의 전 재산과 비슷한 수준인 저로서는 당신의 탁월한 자산 관리 능력에 감탄하게 되고, 더 나아가 구체적인 방법을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아마 저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니까, 당신이 쓰기만 한다면 베스트셀러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아직 읽어 보진 않았습니다만, 이번에 출간된 당신의 회고록에 이런 실용적인 내용은 실려 있지 않은 듯 보입니다.
언론에 인용된 몇 몇 문장을 보니 제 기대와는 많이 달라 보였습니다.
"...광주 사태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대통령이 됐다는 것이 원죄가 됨으로써 그 십자가는 내가 지게 되었다.
.......광주에서 양민에 대한 국군의 의도적이고 무차별한 살상 행위는 일어나지 않았고 무엇보다 '발포명령' 이란 것은 아예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것으로 밝혀졌다.... "
정말 저 문장을 당신이 썼을까?...
신문 기사를 읽어 내려가던 제 눈은 초점을 잃은 체 한참 동안 저 문장 앞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좀 다른 이야기 입니다만, 혹시 라인홀트 한닝 이란 이름 들어 보셨습니까 ?
1921년생이니 당신보다 연배가 조금 높습니다.
올해 아흔 여섯이 되는 이 독일인은 18살이 되던 해 나치 친위대에 자발적으로 가입하고,
1942-1944년 6월, 그러니까 나치 정권이 끝을 향해 치닫던 시기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경비원으로 근무하면서 수용된 유대인들 가운데 일할수 있는 인원과 가스실에 보낼 인원을 구분하는 일을 맡아 수행합니다.
홀로코스트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사람들을 전쟁이 끝난 후에도 꾸준히 색출해 처벌해 온 독일은 전쟁후 오랜시간 숨죽여 지내던 그를 찾아내 법정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작년 2016년, 독일 법원은 그에게 징역 5년형을 구형합니다.
단순 경비원이었던 그였지만, 학살을 용이하게 한 죄, 수용소 내의 총살을 방조한 혐의로 기소되었지요. 검찰은 그를 주요 가해자로 본 겁니다.
아흔이 된 노인을 지금 법정에 세우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몇몇 사람들이 이야기하기도 했습니다만, 독일 정부의 입장은 단호합니다.
현재 생존해 있는 나치 전범들이 자연사 하기 전에 다 사법 처리하겠다는 거지요.
"나치의 만행을 되새겨 기억하는 것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이다 "
아우슈비츠 수용소 해방 70주년 기념식에서 메르켈 총리가 한 이야기입니다.

숨죽여 지내기는 커녕 선거때 마다 나와 꼬박꼬박 투표를 하고, 국가에 반납해야 할 불법 비자금 2천 2백 억을 내지 않고 버티는 것...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부리는 당신의 만용은 딱 거기까지 여야 했습니다.
범죄자가 고개를 들고 큰소리 쳐도 아무렇지 않은 비정상의 시간을 오래 견디어 온 우리가 당신을 참아낼 수 있는 것도 딱 거기까지 입니다.
공수부대의 총칼에 죽어간 자식을 앞에 두고 통곡한 부모들, 자신의 생일이 아버지의 기일이 되어 버린 자식...
그렇게 아무 죄 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수 많은 영혼들과 그 가족들 앞에서 학살을 지시한 당신이 당신 입으로 당신을 희생양 운운 하는 일만은 하지 말았어야 했습니다.

건강하십시오.
진심입니다.
여든 넘은 나이에도 필드를 누비며 골프를 치는 건강한 당신이 어느 날 갑자기 마스크를 낀 체 휠체어를 타고 나타나는 모습을 저는 정말이지 보고 싶지 않습니다.
언젠가, 아니 조만간 우리가 당신을 소환하는 날 건강한 두 다리로 서서, 맑은 정신으로 법정에서 낭독되어지는 당신의 죄들을 하나하나 새겨 들으십시오.
그 날이 당신에겐 인간으로서 최소한의 염치를 알게 되는 날, 그리고 우리에겐 비정상의 시간을 정리하고 제대로 된 시간을 시작하는 날이 될 것 입니다.
아마도 기쁨에 겨운 우리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부터 1일이야"하고 말입니다.

그럼 이만 총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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