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을 들여다 보며 전한 이야기, 그의 마음 속을 거닐다

가을 끝 따듯한 축제, 성 마틴의 날 

지난 금요일은 성 마틴의 날이었다.
카톨릭 주교였다는 그가 엄동설한에 거의 알몸으로 길에 있던 한 걸인을 보고 자기의 망토를 잘라 주었는데, 다음 날 그리스도가 그 잘라진 망토를 입고 꿈에 나타났다는 얘기가 전해 진다.

해마다 11월 초면 성 마틴을 기념하는 축제가 독일 전역에서 열리는데,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학교에서 종이로 등을 만들고, 저녁에 마을 성당 앞에 모여 이 등을 들고 거리를 행진한다. 한 바퀴 마을을 도는 행진이 끝나면 다시 성당 앞에 모여 아이들은 달달한 맛의 브레첼 (Brezel : 숫자 8 자 모양으로 생긴 이 빵은 원래 좀 딱딱하고 짭짤한 맛이 나는 빵인데, 이 날은 특별히 몰랑몰랑한 반죽에 설탕을 잔뜩 뿌려 만든 걸 먹는다) 을 먹고, 어른들은 계피 가루와 각종 향신료를 넣고 따듯하게 덥힌 글뤼바인 (Glühwein) 을 마신다.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 이라고는 하나 내가 보기에 이 축제는 토끼 꼬리 만큼이나 짧은 가을을 아쉬워 하는 마음에서 나온 위안 거리 같다. 흔적을 남기기가 무섭게 사라져 버리는 가을.... 11월 초면 이미 겨울이 시작되고, 4월 까지는 구름이 잔뜩 낀 회색 하늘을 내내 보고 살아야 하니까 겨울을 맞이하기 전 숨 한 번 깊이 들이 쉬고 따듯한 와인으로 마음을 달래고 싶은 건 지도 모른다.

작년, 지흔이가 1학년 이었을 때는 곰돌이 모양의 등을 만들었었는데, 올해는 노란색의 할로윈 호박 모양이다.
학교 수업이 끝나고, 다 만든 등을 조심스레 들고 나오는 지흔이를 데리고 집으로 막 발걸음을 떼려는데, 칼리일이 다가와 반갑게 말을 걸었다.
칼리일은 지흔이와 같은 유치원에 다니던 아이였는데, 지금은 지흔이 옆반이다. 서로 다른 반에 가게 되어 자주 보지는 못해도 가끔 학교 마당에서 마주 치곤 했었다.
“아줌마! 우리 반은요, 무지 큰 고슴도치 만들었어요. 진짜 이 만큼 커요"

칼리일이 팔을 쫙 벌려 자기가 만든 고슴도치 모양의 등이 얼마 만큼 큰 지 보여 주었다. 아이의 설명대로 라면 그 고슴도치는 최소한 황소 만큼은 될 것 같았다.

사실, 3년 전 칼리일을 처음 보았을 때만 해도 나는 이 아이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으리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 아이는 유치원에서 악동으로 소문이 자자했다. 툭 하면 아이들을 밀치고, 놀리고, 머리를 쥐어 박고는 도망치고...어디서 들었는지 이상한 욕도 하곤 했다.
"칼리일이 놀려요", "칼리일이 밀어요", "칼리일이 때려요"... 하는 이야기를 그 유치원 대부분의 아이들이 입에 달고 지내다시피 했다. 칼리일 때문에 유치원 가기 싫다는 이야기를 지흔이도 때때로 하곤 했으니까.
하루는 지흔이 데리러 유치원에 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칼리일이 레오나르도와 같이 지흔이의 머리와 등을 툭툭 치며 놀려 대고 있었다.

”얘들아! 그러는 거 아니다. 그러지 마라"

내가 이야기를 하는 데도 칼리일과 레오나르도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몇 번을 말을 해도 듣지 않자 나는 선생님께로 가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께 단단히 주의를 들은 칼리일과 레오나르도.
..
하지만 나는 그냥 집으로 갈 수가 없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잠깐이라도 아이들과 같이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칼리일! 레오나르도! 아줌마는 있지...너희들이 다 같이 잘 지냈으면 좋겠어. 같이 재밌게 놀고...그랬으면 좋겠어, 정말. 너네는 친구니까..."

레오나르도는 내 얘기가 끝나기도 전에 귀찮다는 표정으로 휙 가 버렸지만, 칼리일은 내 얼굴을 똑바로 쳐다 보고 얘기를 끝까지 듣고 있었다.

아...칼리일의 눈이 이렇게도 예뻤구나...

나는 그 날 처음으로 그 아이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시간이 잠시 멈춘 것 같았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놀고 싶은 친구가 있는 지 지흔이에게 물어 보았는데, 뜻밖의 대답이 흘러 나왔다.

“칼리일"

잘못 들은 것 같아 다시 물었다.
“누구?”

“엄마! 칼리일. 칼리일하고 한 번 같이 놀고 싶어"
“근데, 칼리일이 맨날 너 놀리고, 밀고 그런다며?”

“요즘은 안 그래"

“그래?”

“응, 한 며칠 안 그래. 근데 엄마! 칼리일이 말하는 게 되게 재밌어"

나는 칼리일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서로의 집에 한 번씩 오가기로 했는데, 자기 집에 먼저 왔으면 좋겠다고 칼리일 엄마가 말했다. 칼리일을 위한 조그만 장난감을 사고 칼리일 엄마를 위해 작은 화분을 사서 그 집에 갔다.
이층 구조인 그 집에는 1층에 칼리일과 칼리일 엄마가, 2층에는 칼리일 이모가 살고 있었다. 거실에는 칼라일 아빠가 연주하곤 했다는 아프리카 타악기들이 몇 개 놓여 있었다.
케익을 먹고 차를 마시며 칼리일 엄마와 나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나눴다.
내 예상과는 달리 트리어는 칼리일 엄마의 고향이 아니었다. 초등학교 교사인 칼리일 엄마는 직장 때문에 이 도시로 오게 되었고, 그렇게 산 지 벌써 여러 해라 했다.

두 번째 만남.
칼리일과 칼리일 엄마가 우리 집에 왔을 때 우리는 조금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그리고 나는 칼리일 엄마에게서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다.
처음 이 도시에 와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는 내 이야기에 칼리일 엄마는 독일인인 자신도 쉽지 않았다며 이야기를 꺼냈다.
 외국인 이라고는 주로 유럽인들이 대부분인 이 도시에서 눈에 띄는 피부색을 가지고 있는 아이를 키우는 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았다는 것이다.
까만 피부에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을 가진 칼리일을 두고 많은 아이들이 놀렸고, 어느 날 아이는 집으로 와 엄마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한다.

“엄마! 난 못 생겼어.그리고 난 못된 아이야"

늘 자신만만하고, 두려울 게 없어 보이는 아이였다. 그제서야 나는 칼리일이 조금 보였다.
아마도 많이 버거웠을 것이다. 뜨거운 불덩이를 들고 어디에 놓아야 할 지 몰라 많이 망설였을 것이다. 그 사이 손은 계속 아파 오고, 아프면서도 계속 그 불덩이를 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 뜨거운 것을 내려 놓아도 좋을 만한 곳을 찾기가 힘들었을 테니...
지금도 나는 칼리일이 왜 갑자기 지흔이를 그만 괴롭히게 되었는지 모른다. 지흔이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저, 칼리일이 그 뜨거운 불덩이를 내려 놓아도 좋을만한 괜찮은 자리를 이제는 찾았기를 바랄 뿐이다...

올해 성 마틴의 날 행진은 유난히도 짧았다. 독일의 가을 만큼이나 짧았다.
“엄마! 이게 다야? 벌써 끝난거야?”

지흔이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그러게. 올해는 무지 짧네"
성당 마당에 피어 오른 모닥불 앞에 아이들이 옹기 종기 모여 앉는다. 이다, 샬롯테, 클라라, 파울, 헤니, 에밀리... 지흔이 친구들이 다 보인다.
 잔드라와 프란체스카, 안네가 아이들을 보고 있는 동안 나는 성당 마당 한 쪽에 서 있는 천막으로 갔다.달달한 브레첼을 사기 위해 서 있는 사람들의 줄이 꽤나 길었다.그 복잡 복잡한 와중에 칼리일 엄마와 마주쳤다.
“안녕!잘 지냈어? 근데 가만 ,칼리일은 어디 간 거야?”

“루카랑 루카 엄마랑 저쪽에 있어"

“아...그렇구나. 인사 전해 줘"
"그럴께"

독일의 가을 만큼이나 지흔이와 칼리일이 유치원에서 가졌던 ’좋은 시간'은 짧았지만, 그래도 두 아이에게 그 시간은 쉽게 잊지 못할 시간이 될 것이다. 성 마틴 축제처럼 아쉽지만, 그 시간으로 긴 겨울을 잘 날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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