꽁지 머리 피아니스트 페터

그의 상처를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그가 보였다...

수업 시작 전 빈데발트 선생님이 내게 악보 한 부를 내밀며 말씀하셨다.
“ 이 악보 한 번 봐 주시겠어요? 12학년 졸업 작품할 때 쓸 곡인데요... 안 하셔도 됩니다만 …만약 시간이 괜찮으시면 다른 반주자들이랑 나눠서 같이 해 주실 수 있나 해서요”
이미 내가 다른 곡 편곡 작업을 시작했고, 그래서 딱히 시간이 많지 않다는 걸 아시는 선생님이 조심스레 내게 물어 오셨다.
“음…이 곡은 페터가 하면 잘 할 것 같은 데요…”
힘있는 연주가 필요한 곡이었고, 그런 곡을 잘 할 사람으로 내 머리속에 맨 먼저 페터가 떠올랐다.

페터는 발도르프 학교 반주자인데, 그가 몸이 안 좋아 요양을 떠나면서 대타로 내가 들어 오게 된 것이었다.
작년에 다시 나오겠다고 해 수업 시간표를 다 짜 놓았는데, 갑자기 못 하겠다는 연락이 왔고, 페터가 맡기로 한 수업을 나와 다른 반주자들이 나눠서 맡아야 했다.
1년이 지났지만 페터는 여전히 연락이 없었고, 어느 곳에 머무르는 지 조차 불분명했다.
가끔 빈데발트 선생님과 12학년 졸업 작품 준비를 위한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나는 늘 페터 생각이 났고, 그 때마다 그가 연락은 해 왔는지, 어떻게 지내는지 선생님께 여쭤 보곤 했다. 다른 반주자들도 잘 하지만, 페터는 특히 어려운 클래식 곡들을 시원시원하게 쳐 내는, 그래서 고학년 수업을 맡으면 잘 할 것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솔직히 고백하건대, 페터를 처음 봤을때 나는 그에게서 썩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발도르프 학교에서 반주자를 구한다는 소식을 듣고 이력서를 제출하고 기다렸는데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수업을 참관해 보고 오디션을 보라는 것이었다.
수업을 참관하러 간 그 날 페터를 처음 보았다.
몸이 안 좋아 요양을 하러 떠나는 페터를 대신할 반주자 후보가 나였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페터는 나와 간단한 인사를 나눈 뒤 갑자기 피아노 앞에 앉아 빠른 속도로 스케일을 훑어 내려 갔다. 마치 피아노 조율 하시는 분들이 작업 후 확인 차 스케일을 훑어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리고 나서 그는 몸의 방향을 틀어 내게 물었다.
“당신이 좋아하는 작곡가는 누군가요?”
안 그래도 버쩍 얼어 있었는데, 페터의 질문은 내 머리속을 더 하얗게 만들었다.
내가 별 말을 하지 못하고 멍 하니 서 있자 페터가 연달아 질문을 퍼부었다.
“당신이 만약 12학년 수업을 맡게 되면 라흐마니노프 같은 것도 쳐야 하는데, 할 수 있을까?”
질문 이었지만, 질문이 아니었다.
나는 어리버리한 표정으로 느릿느릿 말했다.
“글쎄요…아직 쳐 본 적이 없어서…”
아직 쳐 본 적도 없다는 내 말에 페터는 다시 피아노 앞에 똑바로 앉아 라흐마니노프 음악들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빈데발트 선생님이 그 때 교실로 들어 오지 않으셨다면 페터의 연주와 질문은 더 길어 졌을 지도 모른다.
선생님을 본 페터는 내가 자기 옆에 서 있고, 게다가 아직 오디션을 보기 전임에도 불구하고 선생님께 내가 어려운 곡들을 소화하지 못할 거라고 거침 없이 이야기 했다.
상대에 대한 최소한의 배려조차 찾아볼 수 없는 그에게 화를 낼 마음의 여유조차 나는 없었다. 다만 “아마도 그와 내가 친구가 될 가능성 같은 건 1퍼센트 정도 밖에 되지 않을 것 같다” 며 속으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브람스 곡을 엉망진창으로 망친 오디션 후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그 뒤 나는 페터의 대타로 학교에서 일하기 시작했고, 동네 슈퍼마컷에서 우연히 두어번 마주친 것 말고는 페터를 본 적이 없었다. 몸은 좀 좋아졌냐고 묻는 내게 페터는 희미하게 웃으며 별로 나아지지 않는다고 했다. 창백한 얼굴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꽁지 머리를 한 페터가 그렇게 희미하게 웃는 모습이 떠오를 때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빈데발트 선생님은 한숨을 푹 쉬시며 내게 이야기를 꺼내셨다.
“내 인내심이 조금씩 바닥을 드러내고 있어요”
1년 동안 전화 힌 통 없는 페터에게 선생님도 조금씩 지쳐 가고 있는 듯 했다.
“내가 언제까지 보호해 줄 수 있을 지 모르겠어요…학교가 마냥 기다려 줄 수는 없을 것 같거든요…”
선생님은 페터에 대해 내가 알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조용히 해 주셨다.
군인이었던 페터의 아버지가 전쟁에 참전하고 난 뒤 얻게 된 마음의 병, 그로 인한 구타…페터와 그의 형은 아버지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다고 했다.
“페터를 도와 주고 싶었어요, 나도…그런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거든요. 본인의 의지가 없으면…내가 도와 주려고 해도 소용이 없어요”
페터는 몸만 아픈게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자전거 페달이 유난히 무거웠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벌써 2주가 지났는데, 아무도 페터가 어디에 있는지 모른다.
시간이 더 지나가기 전에 거짓말 처럼 페터가 돌아 왔음 좋겠다.
창백한 얼굴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그 때처럼 조금 거만한 말투로, 조금 껄렁대는 듯한 자세로 다시 내게 물어 봐 줬으면 좋겠다.
“당신, 이제 라흐마니노프 좀 하나?” 하고…
그와 내가 친구가 될 가능성은 여전히 1퍼센트에 불과하겠지만, 그가 시원시원하게 쳐 내는 라흐마니노프를 듣고 싶고, ”마음에 안드네, 그 성격...” 하고 중얼거리게 될 망정 학교에서 다시 마주치고 싶다.
겨울이 조금, 아주 조금 느리게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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