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어디 할 것 없이 골고루 비쳐주는...

안네와 해리 그리고 그들의 아들 파울

모처럼 날씨가 좋았다.한동안 비바람이 흩뿌려대어서 밖에 나가기 힘들었는데,이제서야 여름 옷 입고 햇볕 쬐게 생겼다.
해리가 아이들 데리고 자전거 하이킹 떠나자며 전화를 했다.


해리는 스코틀랜드에서 온 친구다.독일에서 미술을 공부하다 이 곳에 눌러 앉게 되었고,지금의 아내 안네를 만나서 트리어에 정착하게 되었다.
늘 웃으며 사람들과 이야기하는 해리와 어떤 일이건 좀처럼 서두르는 법이 없는 안네.

이 둘에겐 이란성 쌍둥이 클라라와 파울이 있는데,클라라와 지흔이가 같은 반이다 보니 서로 알고 지내게 되었다.

클라라는 옅은 갈색 머리를 사자처럼 풀어 헤치고 다니는 소녀다.
아빠 해리가 즐겨 듣는 록음악을 틀어 놓고 춤추기를 좋아하고,화가인 아빠의 영향을 받았는지 그림을 아주 잘 그린다.

무척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인 클라라는 가끔 수업시간에 깊은 잠에 빠져 들기도 하는데,한번은 이제 그만 일어나라는 선생님의 이야기에도 꼼짝않고 계속 자는 바람에 선생님이 어깨를 잡고 흔들어 깨운 적도 있었다고 한다.
엄마인 안네가 들려준 또 다른 얘기도 있다.
산수 숙제를 하는데 발을 책상에 턱 하니 올려 놓고 흔들흔들하면서 ”5더하기 4?아...글씨가 너무 작아서 생각을 할 수 없네"하고 연필을 입에 물고 고뇌하는 표정으로 천연덕스럽게 말하더라는 것이다.
어디로 튈 지 모를 이 자유분방한 소녀는 하지만,늘 남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이 크다.지흔이가 아파 이틀 정도 학교에 가지 못했던 적이 있었는데,과제물 가지러 내가 학교에 들렀을때 ”다니엘 괜찮아요?” 하고 제일 먼저 내게 달려와 물었던 것도 클라라였다.
클라라와 이란성 쌍둥이인 파울은 어릴 때 큰 수술을 받았다는데,그 흔적이 아직 가슴에 남아있다.
하지만 매사에 늘 긍정적인 엄마,아빠 옆에서 파울은 그 ’흔적' 따윈 아랑곳 하지 않고 씩씩하게 자라났다.수영도 잘 하고,스케이트 보드도 탈 줄 알고,독특한 발상으로 재미난 그림도 그리는 보통의 7살 소년으로 말이다.건강상의 이유로 학교 입학을 미뤘었는데,이제 8월이면 학교에 간다.

6,7km정도 달리고 좀 쉬다가 다시 집으로,그러니까 왕복 14km정도 되는 거리다.
집 근처 호수 가나 기껏해야 3km정도 되는 강변길을 달려본 지흔이가 이렇게 먼 거리를 가 보기는 처음이다.
“누가 먼저 제일 앞에서 달리고 싶니?”

안네가 아이들에게 물었다.
“저요"

“아니,내가 먼저 할 거야"

“내가 제일 잘 타니까 내가 앞에 갈거야"

아이들이 서로 하겠다고 다투기만 하고 결정을 내리지 못하자 안네가 말했다.
“얘들아!그것 참 유감이다.너희들이 같이 의논해서 결정을 하지 못했으니 첫 출발은 내가 앞에 가야겠다.다음 쉬는 시간에 다시 한 번 더 얘기해 보자"

아이들이 다들 에이~하며 실망한 얼굴로 투덜거렸다.
모처럼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 해 덕분에 다들 얼굴이 발그스레해지고 땀도 조금씩 흐르기 시작했다.
3km쯤,이제 반 정도 왔나 했는데 지친 클라라가 쉬고 싶다고 해서 잠깐 길에서 자전거를 멈추고 다들 안네가 나누어 주는 비스켓과 젤리를 먹었다.

“이럴땐 동기 부여가 필요하거든”
안네가 살짝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물도 마시고 꿀맛같은 젤리도 먹고...그렇게 잠깐의 휴식이 끝나고 출발하기 전 안네가 아이들에게 물었 다.

“자,얘들아! 이번엔 누가 앞에서 갈거니?”

셋이서 의논을 해 순서를 정하지 않으면 셋 다에게 기회가 오지 않는다는 걸 앞서 경험한 아이들이 이번엔 좀 다르게 이야기 하기 시작하더니 자기들끼리 순서를 정했다.
“그래,이번에는 다니엘이 앞에 가고,그 다음엔 클라라,그 다음엔 파울.됐지? 그럼 이제 출발한다”

얼마쯤 갔을까?이제 좀 있으면 목적지에 도착하겠다는 생각이 들 즈음 아이들이 서서히 지쳐갔다.
파울이 속력을 내지 못하자 파울 뒤에 있던 지흔이가 빨리 가라고 재촉하는 게 보였다.
자전거만 타면 신나서 씽씽 달리는 지흔이가 저보다 속도가 느린 친구의 호흡에 맞추려니 답답했던 모양이었다.
지흔이 뒤에 있던 해리가 파울을 재촉하지 말라고 지흔이에게 얘기하긴 했지만,좀 더 제대로 이 야기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아 지흔이에게로 달려갔다.
“지흔아!친구가 힘들어 하면 ’괜찮다,잘 하고 있다,힘내라'그렇게 이야기 해 줘.빨리 가라 하지 말고.
다같이 가고 있는 거잖아.니가 그렇게 이야기 해주면 파울도 더 힘을 낼 수가 있어.그래야 또 친구고"

“왜 그렇게 말하면 더 잘 달려?”
“너 걷다가 힘들 때 엄마 아빠가 ’힘내라,잘 하고 있다'하고 말해 주는게 좋아? 아님 ’빨리 걸어’ 그렇게만 말해 주는게 좋아?”

“잘 하고 있다고 말해 주는게 좋아"

“그래,파울도 그럴거야"
파울의 가슴에 남아있는 흔적의 의미를 아직 지흔이는 잘 모르지만,그래도 엄마의 말을 조금은 이해했는지 파울의 속도에 맞추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우리 동네에서 6,7km 달려온 곳엔 오래된 작은 성 하나가 있었다.

자전거에서 내려 마른 목을 축이고,가지고 간 빵과 과일을 나눠 먹었다.파울이 가방에서 작은 공 하나를 꺼내자 지흔이와 클라라도 같이 어울려 공을 차고,그러다 성벽 틈 사이에 기어 다니 는 작은 벌레들을 들여다 보기도 하고 ,경사진 풀밭 위를 떼굴떼굴 구르며 까르르 웃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파울이 가슴에 통증이 있다며 힘들어 한다.아마 피곤해서 그런 것 같다며 해리가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었다.
자전거 탈 수 있으려나 했는데,아빠와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파울이 자전거에 오른다.

“멋지다,파울"

“기운 내라,파울"

다들 파울을 응원하고,그 응원 소리에 기운을 낸 파울도 열심히 페달을 밟았다.
“엄마!지흔이 지금 잘 달리고 있지?아주 똑바로,응?”

친구의 속도에 맞춰 달리고,중앙선 넘지 않는 규칙도 잘 지킨 걸 칭찬 받고 싶은 지흔이가 내 옆으로 다가와 물었다.

“응.아주 잘 하고 있지"

엄마의 칭찬에 기분 좋아진 지흔이가 씨익 웃었다.

여름방학이 끝나면 학교에 가는 파울은 이제 새로운 생활을 시작하게 될 것이다.
쉬는 시간에 우르르 몰려 나오는 덩치 큰 상급생들과 부딪혀 넘어지기도 하고,때론 친구들과 싸우기도 하고,그러다가 화해도 하고...
가슴에 남아있는 그 ’흔적'이 발목을 잡으려 할 때 마다 자신과의 치열한 싸움도 마다 않으며 그렇게 또 세상을 향해 한 발짝 내디딜 것이다.
그리고 그 옆에서 지흔이 역시 친구와 같이 호흡 맞춰 걸어가는 법을 배우며 또 한 뼘,한 뼘 자랄 것이다.
아직 쨍쨍한 햇볕이 머리 위로,땅 위로 뻗어 내렸다. 아주 골고루,어디 할 것 없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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