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 머리 앤 아주머니

닫힌 마음의 문을 열다...

빨간 머리 앤 아주머니...
내가 우리 동네 슈퍼마켓 정육점 코너에서 일하시는 한 아주머니에게 부쳐 드린 별명이다.

처음 아주머니를 만났을 때가 4년전, 우리가 막 이사 왔을 때였다.


칼스루에에서 트리어로 이사 하기로 한 날 지흔이는 열이 40도로 펄펄 끓었다. 이틀 뒤로 이사를 미루기는 했지만, 짐을 다 싸서 먼지 투성이인 집에 아이를 계속 둘 수는 없었다.
해열제를 먹인 뒤 열이 조금 떨어지면 자동차로 빨리 이동하라는 의사에 말에 약을 먹이고 흔이를 차에 태웠다.
차 안에서 약 기운이 떨어져 서서히 열이 올라가는 아이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지켜 보며 우리는 그렇게 칼스루에를 떠나 이 곳으로 왔다.

아이가 아프니 다급하게 장을 봐야 했다.

우리 집 근처 슈퍼마켓에 갔는데, 중국산 이긴 하지만 생강도 있고, 스페인산 마늘도 있었다.
닭죽을 끓이기 위해 마늘을 사고 정육점 코너로 갔다.
 내 차례가 되자 나는 먼저 인사를 했다. 그리고 닭고기 가슴살을 사고 싶다고 말했다.

그 때 그 곳에 빨간 머리 앤 아주머니가 있었다.
아주머니는, 섹스 앤 시티'에 나오는 캐리가 ’유럽의 촌에 사는 아줌마가 할 법한 빨간 머리'라고 혹평을 퍼부었던, 딱 그 컬러로 염색한 짧은 머리를 하고 있었다.
45도 각도로 천정을 바라 보던 아주머니가 잠시 후 말했다.

“뭔 말을 하는 지 도통 알아 들을 수가 없네"

순간 나는 당황이 되었다.
’내가 말을 잘 못 했나?’

마음을 가다 듬고 인사를 하고는 다시 한 번 더 이야기 했다.

“닭고기 가슴살을 사고 싶은데요"

이번에도 아주머니는 나를 쳐다 보지도 않고 여전히 45도 각도로 천정을 바라 보며 아까 보다 조금 더 거칠게 말했다.

“정말 뭔 말인지 알 수가 없네"

그러더니 안쪽에서 일하고 있던 다른 동료에게 이렇게 소리 치는 것이었다.

“너는 이 여자가 뭔 말 하는 지 알겠냐?”

그제서야 나는 빨간 머리 앤 아주머니가 내 말을 못 알아 듣는 게 아니라, 내게 고기를 팔고 싶지 않은 것임을 깨달았다.

동양인과 안 좋은 추억이라도 있는 건 지, 아님 별 다른 이유 없이 그냥 외국인을 싫어하는 건 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 순간 나는 다른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가 없었다.

내 뒤에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할 틈도 없었다. 아이가 아프니 빨리 닭죽을 끓여야겠다는 생각뿐 이었다.
작정하고 판매 거부를 하는 아주머니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딱 하나 밖에 없어 보였다.
나는 닭가슴살이 수북이 쌓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 집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짧게 말했다.
“이거요"

더는 다른 말을 할 수 없게 된 아주머니는 세 살짜리 아이도 눈치챌 수 있을 만큼 잔뜩 화가 난 표정으로 닭고기 가슴살을 저울 위로 패대기 쳤다.
그리고 좋은 저녁 되시라는 내 인사도 듣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그 뒤 나는 고기를 사러 갈 때마다 빨간 머리 앤 아주머니와 적잖이 마주 쳤고, 그 때 마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이라곤 웃으면서 정중하게 인사를 하고, 아주머니가 알아 듣건,못 알아 듣건 상관없이, 고기를 사고, 받아 주건, 안 받아 주건 "좋은 저녁 되시라", "좋은 하루 되시라" 하고 인사하는 것이었다.
아주머니의 빨간색 짧은 머리 스타일은 4년 동안 단 한 번도 바뀌지 않았는데, 그 변하지 않는 헤어 스타일 만큼이나 나를 대하는 태도도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다만, 고맙게도 더 이상 ’못 알아 듣겠다' 고 말한다거나, 죄 없는 닭고기를 패대기 치는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얼마 전이었다.

나는 늘 하던 것처럼 빨간 머리 앤 아주머니에게 인사를 하고, "닭고기 가슴살을 사고 싶은 데요"하고 말했다.
아주머니는 여전히 무뚝뚝한 표정으로 별 말 없이 고기를 싸 주었다. 그리고 나는 늘 하던 대로 ”좋은 저녁 되세요" 하고 인사를 하고 돌아 섰다.

그 때였다.
믿기 힘든 한 마디가 들려 왔다.

“당신도"

나는 다시 뒤돌아 서서 아주머니를 바라 보았다. 아주머니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내 쪽은 쳐다 보지도 않은 체 다른 사람의 주문을 받고 있었다.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아 바람이 차가웠다. 걸음을 뗄 때 마다 흔들거리는 봉지를 손목에 끼우고 손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차가운 바람에도 길가 나무들이 새순을 틔운체 서 있었다.
 봄이 오기는 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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